세탁기가 인터넷보다 세상을 더 바꿨다?
주말을 맞이해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을 하나씩 꺼내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 저는 대체로 책을 한 번 쓰~윽 읽고는 곧바로 책장에 꽂아두는 편인데, 얼마 전부터는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경험을 합니다. 예전에는 “충분히 기억하고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까맣게 잊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죠. 그래서 다시 읽는 과정은 언제나 작은 발견과 같은 즐거움을 줍니다.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이번에 다시 펼쳐본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눈길이 머문 대목은 바로 이 문장입니다.“세탁기가 인터넷보다 인류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처음 읽었을 때도 인상적이었지만, 다시 읽으니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인터넷이 세상을 연결한 혁신적 기술임은 분명하지만, 장 교수는 생활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오히려 세탁기 같은 생활 기술이었다고 강조합니다.
혁신의 본질, 책 속 맥락
장하준 교수는 자유시장주의가 주장하는 “최첨단 기술 혁신 = 사회 진보”라는 단순한 등식을 비판합니다. 그는 인터넷이 정보 접근과 소통 방식을 혁신했다면, 세탁기는 노동 해방과 사회구조 변화를 만들어낸 기술이었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세탁기의 보급은 여성들이 가사노동에서 벗어나 교육을 더 받고, 노동시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편리함을 넘어 사회적 혁명에 가까운 변화였습니다.
세탁기의 힘, 수치로 드러난 변화
세탁기의 영향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연구에서도 확인됩니다. 20세기 초 미국 여성들은 주당 40~50시간을 빨래, 청소, 음식 준비 같은 집안일에 쏟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탁기와 냉장고, 청소기 같은 가전제품이 보급된 1970년대에는 그 시간이 20시간 이하로 줄었습니다. 이 변화는 단순히 집안일이 빨라졌다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집안일에서 해방된 여성들은 더 오래 교육을 받고,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실제로 Greenwood, Seshadri & Yorukoglu(2005)의 *〈Engines of Liberation〉*은 가전제품의 보급이 여성 노동시장 참여를 촉진한 핵심 요인이었다고 분석합니다.
물론 일부 연구는 “총 가사노동 시간은 크게 줄지 않았고, 단지 노동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체적인 연구 결과는, 세탁기와 같은 ‘시간 절약형 기술’이 사회 구조 변화를 촉진한 조용한 혁명이었다는 점을 뒷받침합니다.
인터넷의 혁신, 그러나 다른 성격의 변화
인터넷은 분명 인류의 소통 방식과 정보 접근을 혁명적으로 바꾸었습니다. 다만 경제학적 통계와 생활사의 맥락에서 보면, 그 효과는 세탁기처럼 직접적이고 즉각적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1990년대 IT 붐 시기에 생산성이 반등하기도 했지만, 장기적인 성장률 둔화 속에서 인터넷의 기여도를 뚜렷하게 측정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로버트 솔로우의 “컴퓨터는 어디에나 보이지만 생산성 통계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현상을 잘 보여줍니다. 즉, 인터넷의 혁신은 부정할 수 없지만, 생활의 시간 배분과 가족 구조까지 뒤흔든 세탁기의 변화와는 다른 성격의 혁신이었습니다.
낙후지역 지원, 세탁기일까 인터넷일까?
이 책의 논지를 오늘날 현실에 비추어 보면 흥미로운 질문이 떠오릅니다. 만약 우리가 낙후지역을 지원한다고 할 때, 세탁기를 보급하는 것이 효과적일까요, 아니면 인터넷을 지원하는 것이 효과적일까요? 인터넷은 교육, 정보 접근, 원격 의료, 전자상거래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하지만 인터넷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안정적인 전력, 디지털 기기, 교육 수준, 시장 인프라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이런 기반이 없는 지역에서 인터넷 보급만으로는 삶의 질을 당장 바꾸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세탁기와 같은 생활 가전은 훨씬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효과를 줍니다. 가사노동 시간을 줄여주고, 여성과 아이들이 교육·노동시장에 참여할 여유를 만들어주며, 일상의 구조 자체를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개발경제학에서도 “시간 절약형 기술(time-saving technology)”이 낙후지역 생활수준 개선의 핵심 변수로 꼽히곤 합니다.

생활 인프라와 세탁기, 더 근본적인 혁신
생각해보면, 낙후지역 지원에서 진짜 혁신은 단순히 최첨단 기기를 보급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기망을 깔고, 상하수도 문제를 해결하며, 세탁기 같은 생활 가전을 보급하는 것이 더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인터넷이나 디지털 기술은 기반 인프라가 없는 지역에서는 효과가 제한적입니다. 전기 공급이 불안정하거나 깨끗한 물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인터넷 접속만 제공하는 것은 실질적 생활 개선으로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전기·상하수도 인프라가 구축되고 세탁기 같은 생활 기술이 도입되면, 주민들은 가사노동 시간을 줄이고 위생 상태를 개선하며, 교육과 경제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편리함을 넘어 사회적 자본(human capital) 형성과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집니다.
즉, 화려한 디지털 혁신보다도 기초 생활 인프라와 생활 가전의 보급이야말로 낙후지역에 더 지속적이고 체감 가능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혁신일 수 있습니다.
다시 읽는 즐거움, 그리고 현재성
다시 읽는 책은 늘 새로움을 줍니다. 예전에는 스쳐 지나갔던 문장이 다시 눈에 들어오고, 이해했다고 믿었던 부분이 사실은 희미하게만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되지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속 세탁기와 인터넷의 비교는 단순한 역설을 넘어, 우리가 무엇을 진짜 혁신이라 불러야 하는지를 다시 묻게 합니다.
출간된 지 10년이 넘은 책이라 “혹시 지금은 맞지 않는 얘기가 아닐까?”라는 의문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오늘날에도 그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AI, 빅데이터, 플랫폼 경제가 일상을 지배하는 시대에도, **“기술이 인간의 삶을 실제로 어떻게 바꾸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평등의 심화, 돌봄 노동의 부담, 디지털 격차 같은 현실을 떠올려보면, 장하준 교수가 던진 메시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즉, 화려한 최첨단 기술이 아니라 생활 기반을 뒤흔드는 작은 혁신이야말로 사회를 더 깊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통찰은, 오늘의 정책·개발 논의에서도 중요한 기준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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